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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 2017년 04호
국립암센터 이은숙 교수와 환우 이연희(가명)씨의 토크
“암을 이긴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젊은 시절 암 치료를 이겨내고 난후에도 자신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위해 노력한 이연희 환자(가명)와 그녀의 주치의인 국립암센터 이은숙 선생님의 암을 이긴 이후의 삶을 살아아가는 이야기를 이번 호 <더 캔서>가 담아보았다.
edit_도윤경 photograph_신기환 기자 | 2017-05-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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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환우 원래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정도 15년 정도 전이였어요. 제가 스물 두세살 정도 되었을 때니까 오래 전이긴 하네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가슴에 이상이 생겨서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너무 어려서 당시에는 가슴에 이상이 생겼는지 잘 모르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병원을 찾게 되었어요. 당시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서 주변에 조언을 받을 수가 없어서 더욱 몰랐던 거죠.


이은숙 교수 연희씨가 병원에 왔을 때는 벌써 3기로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어요.
당시 대학교 4학년이였나. 철이 없는 젊은 청년이였을 뿐이었는데 대부분 이 나이 또래는 병이 얼마나 중요한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냥 병원을 찾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할수 있는 나이들이죠.


이연희 환우 국립암센터로 선생님을 찾아가기 전에 이미 다른 큰 병원을 갔었어요. 아주 유명한 병원을 소개받아서 갔었는데 무조건 전 절제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땐 그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어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수술을 할 수 없었고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또 다른 개인병원을 찾아서 사정 설명을 했더니 국립암센터 이은숙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은숙 교수 국립암센터 유방암센터가 2001 년에 오픈했으니까 그전에 기라성 같은 다른 병원들이 많았어요. 그땐 다들 나이가 젊었고, 저도 젊은 시절이었죠(웃음). 그래서 다른 병원들과 차별화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고, 치료 부분에서 좀더 앞서갈 수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생각했죠.
당시 국립암센터 유방암센터는 그래서 환자들 동의를 받아서 임상시험도 많이 하고 있을 때였죠. 그때 수술전 항암요법 임상 시험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걸 연희씨에게 적용했고, 굉장히 좋은 효과를 봤고, 암 덩어리를 줄인 후에 수술을 해서 부분 절제술로 유방을 살릴 수 있었어요. 굉장히 좋은 케이스였죠.


이연희 환우 지금은 그런 수술방법이 대중화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지가 못했어요. 몸에 암 덩어리가 있으면 무엇보다 빨리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였 지, 어떤 식의 절제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 었던 시절이었죠. 저에게 선택권이 없었어요. 선생님들이 당연히 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 저는 쇼크를 받았어요. 문제는 살릴 것인가였기 때문에 당시 병원의 선생님들이 그러셨겠지만 저와 같은 젊은 환자들을 정말 입장이 달랐어요. 처음 소개 받아서 갔던 병원에서 바로 수술날짜를 잡겠다고 했는데 제가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을 소개 받았는데 저의 그런 부분을 제대로 알아주 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산에 국립암센터를 찾았을땐 허허 벌판에 병원이 있는 것 보고 정말 불안했는데(웃음) 선생님은 안심을 바로 시켜주더라구요. 걱정하지 말라고 할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항암치료 후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저는 거기에 동의했고, 실제로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제대로 한 셈이 되었죠.


이은숙 교수 당시 연희씨는 수술전 항암치료를 먼저 했고, 다행이 사이즈가 많이 줄어서 부분 절제 수술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아무일 없었던 것도 당시 항암제가 잘들었던 이유겠죠. 그 당시로 돌아보면 젊은 환자들의 경우에는 실패사례도 많고, 물론 성공 사례가 더 많지만 실패 사례만 더 부각되잖아요. 그래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매우 상태가 좋았고, 8개월 정도 서로 열심히 치료를 했죠.


이연희 환우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치료 때문에 미뤄졌고, 또 바로 지방으로 가게 되었어요.병의 치료를 위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죠. 그러데 거기에서 회사에 취직하게 되어서 일반 사람들처럼 살았고, 1년에 한 두 번 정도만 병원에 가고 거의 의식하지 않았어요. 합병증도 전혀 없었고, 약도 먹지 않았으니까. 저는 수술 후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요.


이은숙 교수 너무 어린 나이에 암에 걸렸으니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을 때 지장을 받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 결혼을 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아기도 낳았어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모든 의사들이 원하는 것이 환자들이 정상적으로 살아 가고 있는 것 자체에 너무 감사함을 느끼고 뿌듯하게 생각하죠. 하나의 좋은 사례가 백가지 힘든일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과 같지요.


이연희 환우 결혼을 하고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가지 않았어요. 시간도 오래되고 임신을 하고 나니 산부인과에서 특별한 이상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사선 치료를 한 쪽말고 반대쪽으로 수유도 하고 했는데 치료 받았던 쪽이 이상하게 다시 딱딱해지는 거예요.
그때 다시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이은숙 교수 진짜 문제가 생긴 것은 유방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때인거죠. 다른 부분으로 전이가 되면 정말 큰일이지만 유방 자체의 문제는 충분히 치료 할 수 있어요.
다시 찾아온 것이 2015년이었으니 10년 만에 발병했는데 여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고 조언했어요. 우리가 같이 지난 10 년 동안 유방의 문제를 해결해왔으니 앞으 로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했죠. 또 발병을 안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너무 젊었을때 질환을 앓았기 때문에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죠. 젊었을 때가 아니라도 50-60 대 발병할 여지가 있었어요. 역시 항암제 투여를 먼저하고 수술을 했고, 결과도 좋았어요.

이연희 환우 치료를 다시 받으러 병원을 찾았더니 10년전과 많이 달라졌더군요. 제가 처음엔 젊은 환자들이 거의 없었는데 많아졌더라구요. 지금은 유방성형이나 임신 등 다양한 검진을 통해서 빨리 발견한 다고 들었는데, 제 주변도 몇 분이 계세​요. 처음에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두 번째는 여전히 선생님이 괜찮고 별일 아닌 것처럼 해주셔서 심리적으로 불안감이 훨씬 적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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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환우 젊은 환자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보다 정보가 더 많고 오히려 정보가 더많아서 불안해 하는 경우가 많아요. 카페 같은데서 후기들도 과장이 많고 개인적인 것이라서 주관적인 것이 아니잖아요. 너무 좋은 경험도 어떤 환자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저같은 경우에도 처음 병원이 굉장히 유명했지만 저와 성향이 맞지 않았던 것처럼 환자들도 예전과 달리 여러 병원을 알아보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이은숙 교수 이젠 환자들도 닥터 쇼핑을 하는 거죠. 4-5명 정도의 전문의들을 만나 는데 좋은 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실제로 잘 알지 못하지만 잘​
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의 현상 중 하나를 들어보면 진실을 진실대로 믿지 않고 진실을 자신의 의지로 왜곡하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현상이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그런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이연희 환우 저는 그런 면에서 선생님과 잘맞았어요. 원래 불필요한 것을 물어보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선생님도 최대한 저를 안심시켜 주셨고요. 어떤 선생님들은 너무 사실대로 얘기해서 매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잖아요. ‘제가 죽을 수도 있나요’ 하면 ‘죽을수도 있죠’ 하고 대답하는 것 처럼이요. 그런데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긍정적이고 좋은 기운을 주실려고 노력하셨고, 제 상처가 그 과정을 통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그대로 믿고 따라갔고, 또 치료도 성공적이였으니까 더 교감이 좋았죠. 치료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드라마틱하고 인생을 바꿔놓는 거니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의사선생님과 안 맞으면 불만이 커질 수도 있고요. 내 생존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불안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고, 또 실제로 괜찮았으니까요(웃음).

이은숙 교수 젊은 환자들을 보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인생의 여러 가지 변화를 겪어야 하는데 어릴 때 병 때문에 집착해서 움츠려 들고 아무것도 안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병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경우는 빨리 인생을 포기하는 것도 많이 보아왔어요.
연희씨처럼 유학도 가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강하게 살아나간다면 정말 고맙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들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깝지요. 그런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예요. 병에 걸렸을 때 남편이나 아이들이 정상 생활로 돌아오기 전까지 많이 도와주다가 병이 나았을때는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죠. 그럼 환자들은 내가 환자인데 배려를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쌓이고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주부나 직장인이나 각자의 롤이 있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환자를 돌봐주는 상태가 계속되길 원하는 경우에는 남편 입장에서도 집에가면 와이프가 기분이 좋아야 하느데 항상 불만이 있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어려워지면 가정이 힘들어지잖아요. 그럼 환자들이 마음의 병으로 와서 멘탈이 너무 망가지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강의를 해도 멘탈 디스토마, 멘탈 트리트먼트에 대한 강의를 해요. 환자들의 멘탈을 더 강화시켜 주고 병으로부터 자유로 워질 수 있는 마음의 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어요.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은 어느 상황이나 마찬가지 잖아요. 그런 것을 환자들에게 인지하게 해주고 삶은 앞으로도 흘러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이연희 환우 저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아휴을 쓸수 있는 상황이여서 편하게 휴직을 했었는데 복직을 할 때 가족들이 엄청나게 말렸어요. 아마 아기도 어리고 저는 제가 아파보지 않았다면 퇴사도 했을 것 같은데 저는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 삶이 계속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단은 다시 복직하고 그만두더라도 다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4개월 정도 가발을 쓰고 회사를 다녔어요. 그때 저의 회사 일이 많아 바쁘니까 그런 것을 많이 우울해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아요. 저의 질병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서 무엇 보다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저는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은 저를 과도하게 생각 해서 배려해주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예요. 힘든 질병을 겪었지만 지금은 정상생활을 하고 있고, 또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거든요.


이은숙 교수 치료를 할 때 도와주던 가족들이 정상생활로 돌아갔다고 허탈감을 느끼는 것 보다 자신 스스로 삶이 계속됨을 느끼고 자신의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환자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어요. 치료 자체는 이제 일정 수준 이상이기 때문에 이제는 생존의 문제, 그러니가 삶의 질의 문제이거든요. 인생의 진로를 변경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 결
정하는 것도 중요하고, 병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울 수는 없어도 최대한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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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암매거진 2017년 04월
지난 THEC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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